오늘 말씀은 사무엘상 20:11-23절 말씀입니다.


대단한 두 사람의 우정과 언약

사람은 흔히 어떤 사람이 밉거나 싫으면 희한하게도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가족까지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 관계속에 살다 보면 갈등이 있을 수 있고 어떤 문제로 인해 미워하는 감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천은 그 미워하는 감정의 마음도 빨리 주님 앞에서 해결해야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시간이 조금 걸리고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에 그 사람이 속한 것, 즉 그 사람이 남자일 경우에는 그의 아내, 그 사람이 여자일 경우에는 그의 남편, 그의 자녀까지도 전부 다 미워합니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기르는 개까지 싫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성을 가진 자의 우리의 못된 모습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가 틀어지면 목사만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사모도 싫어하고 그 목회자 자녀들도 싫어합니다. 조금 전에 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한국에서 목사님 중에 개를 키우는 목회자들도 많은데, 이제 그 개까지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천들로서 어떤 사람과의 갈등의 문제를 주님 앞에서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므로 그 사람의 가족 전체까지 싫어하는 것은 구원받은 크리스천의 모습이 진정 아닐 것입니다.

제가 왜 오늘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윗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해를 끼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사울에게 악한 감정을 먼저 가졌다거나 그의 지위를 탐했다거나 여하튼 사울에게는 눈꼽만큼도 사심이 없었고 잘못 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다윗을 계속해서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 배운 것처럼 다윗이 얼마나 사울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힘들었으면 '나와 죽음은 한걸음 사이'라고 말했겠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다니면서 다윗이라고 왜 사울에게 점차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이 그 사울의 아들 요나단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갖는 마음, 즉 저 사람이 밉고 싫으면 집안 전체를 다 미워하는 그런 마음을 다윗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실 다윗이 당한 환경은 우리와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우리와는 견줄 수 없는 상황에 다윗은 쳐해져 있었습니다. 사울은 직접 다윗을 여러 차례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그저 미워하고 싫어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의 아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보통 사람들처럼 행한다면 다윗이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믿지 못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요나단을 볼 때에 사울을 보는 것처럼 치를 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요나단을 신뢰하고 요나단 역시 다윗을 신뢰합니다. 둘은 우정으로 언약을 다시 맺습니다.

지난번 한번 깊은 우정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언약을 맺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하길, 어떤 자라도 만약 다윗을 적으로 삼는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다윗의 적이 되지 않을 것이니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앞으로 선대해 달라며 언약을 맺습니다.

요나단도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윗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대단한 두 사람을 여러분은 보고 계십니까? 그들이 무슨 기적을 행하거나 무슨 큰 일을 행해서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저 두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며 오히려 깊은 언약을 맺은 것이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대로 죄된 일반 사람들이었다면 요나단도 다윗을 죽여야 합니다.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계승하려면 다윗이 없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보면 나라마다 왕이 되기 위해 형제들도 죽이는데 피도 섞이지 않은 부하 한명 죽이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토록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하여 죽이고 싶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인 요나단도 다윗에 대해 미움을 갖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이 아닙니까?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며 다윗을 돕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믿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죄된 일반 사람이었다면 다윗은 요나단도 미워해야 마땅합니다. 왜 가족도 미워하지 않습니까? 그의 아버지로 인해 이렇게 목숨이 위태로우니 그의 자식들까지 미워하는 것은 어찌보면 죄인들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생각하기를 사울은 사울이고, 요나단은 요나단 이처럼 별개의 문제로 본 것입니다.

요나단과는 생명을 같이하는 우정으로 언약을 맺어 신뢰했던 관계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다윗이 하나님을 진정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요나단이나 다윗이나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도 대단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무슨 기적을 행하거나 아주 큰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살면 대단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믿고 따른다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감정조차도 하나님께서 다스려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우리의 감정을 충동질하여 별것도 아닌 것에 분노케 만들고, 시기하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되 마귀는 절대로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미움을 더 크게 만듭니다. 그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모든 것을 밉도록 만듭니다.

다시말해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속한 모든 것을 똑같이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귀는 이처럼 우리의 감정을 통해 전체를 다 파괴하길 원하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넓은 마음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품을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조차도 나중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되는대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미운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 감정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고 이제 본격적으로 다윗을 돕고자 합니다. 그래서 들에 숨어 있으라고 하며 자신이 사울왕의 굳은 결심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나서 3일 후에 들로 와서 신호가 담긴 의미의 화살을 에셀 바위 곁에 쏘겠다고 합니다.

세 번의 화살을 쏜 후에 부하를 보내어 화살이 이쪽에 있다 하면 다윗이 돌아 와도 된다는 신호이고 만약 네 앞쪽에 있다고 하면 네 갈 길로 가라 이는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려고 마음 먹은 것이라고 일러주겠다고 신호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도 대단하지만 요나단도 참으로 대단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그를 위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합니다. 이미 배운대로 왕권에 대한 상징으로 쓰이곤 하는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또한 그의 칼과 그의 활과 그의 띠 또한 다윗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우정으로 사랑합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다하는 아카페적 사랑입니다. 다윗을 두둔하고 살려둔다고 하여 요나단도 아버지 사울이 던진 단창에 죽을 뻔합니다. 목숨을 건 우정입니다.

오늘 말씀을 받은 여러분, 저들 두 사람처럼 대단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넓게 가지시고 한번 대단한 신앙인이 되겠노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기도한대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